MARC보기
LDR01964nmm c2200253 k 4500
001000000273994
00520190828131539
008190827s2016 ulk z e a kor
020 ▼a 9788966550630 : ▼c \8000
040 ▼a 248032 ▼c 248032 ▼d 248032
056 ▼a 811 ▼2 5
090 ▼a 811 ▼b 노88ㅂ
1001 ▼a 노태맹
24510 ▼a 벽암록을 불태우다 : ▼b 노태맹 시집 ▼h [전자책] / ▼d 노태맹
256 ▼a e-Book
260 ▼a 서울 : ▼b 삶이보이는창, ▼c 2016 : ▼f (주)블루마운틴소프트
300 ▼a 207k : ▼b 천연색
440 ▼a 삶창시선 ; ▼v 45
516 ▼a XML
520 ▼a 그러나 앞서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시의 임무는 보이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람직한 소통’은 가능하지도 않고 이데올로기적으로도 옳지 않다. 보이 지 않는 힘을 보이도록 하는 시도는 소통이 아니라 폭력에 가깝다. 존재하지 않던, 보이지 않던 힘들이 독자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과거의 예언자들이나 사제들처럼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 하나를 던져준다. _시인의 산문 「碧巖錄을 불태우다」 중에서 그렇다, 시는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다! 노태맹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벽암록』을 읽으면서 시작된다. 게송이기도 하고, 익살이기도 하고, ‘깨달음’이라는 도그마에 대한 주장자(柱杖子)이기도 한 『벽암록』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모호한 텍스트이다. 노태맹 시인이 그 『벽암록』을 읽으면서 시집을 시작한다는 것은, 어떤 은유이다. 어떤 은유? 바로 우리가 사는 화탕지옥에 대한 은유. 아니 화탕지옥을 살아가는 시인 노태맹 자신에 대한 은유. 『벽암록』을 옮겨놓은 듯한 시들을 쓰면서 시인의 내면에서 무엇이 들끓고 있는지 알아채기에는 그래서 쉽지 않다. 시인은, 시집 뒷표지에 통상 있게 마련인 ‘추천사’나 혹은 시인 자신의 군말을 빼고 “시는 소통이 아니라 불덩어리이다”라고 단 한 문장만 박아놓았다. 이 문장은 또다시 ‘해설’이나 ‘발문’ 대신 실은 시인 자신의 아포리즘의 한 구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문장이 들어간 아포리즘 앞에는 이런 구절이 배치되어 있다.
653 ▼a 문장작법 ▼a 수사학
7001 ▼a 노태맹
7761 ▼a 노태맹 ▼t 벽암록을 불태우다 ▼z 9788966550630
85640 ▼u http://ebook.kaya.ac.kr:8080/main/detail.asp?book_num=X0171381
950 ▼b \8000
990 ▼a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