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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 ▼a 911 ▼b 지19ㅇ
1001 ▼a 지눌
24510 ▼a 원돈성불론 : ▼b 선종과 교종의 합일을 꾀한 지눌의 역작 ▼h [전자책] / ▼d 지눌
256 ▼a e-Book
260 ▼a 서울 : ▼b 두산동아, ▼c 2010 : ▼f (주)블루마운틴소프트
300 ▼a 6,395k : ▼b 천연색
440 ▼a 한국인이꼭읽어야할한국고전및사상100선 ; ▼v 60
516 ▼a XDF
520 ▼a 어떤 사람이 목우자(牧牛子: 보조국사 지눌의 호)에게 묻기를, “스님의 주장을 들으니 ‘요즘 마음을 닦는 사람은 먼저 제 마음의 날마다 쓰는 무명(無明: 불교의 근본의(根本義)에 통달하지 않은 마음의 상태로서 모든 번뇌의 근원이 된다고 함) 분별의 종자(種子: 만유의 물심 현상을 내는 마음의 힘이나 작용)를 모든 부처님의 부동지(不動智: 우주의 근본 앎)로 만든 뒤에 사람의 본바탕에 의해 선(禪)을 닦는 것이 묘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부동지의 불도 수행으로 얻는 과보(果報)는 본래 깨달아 있는 이불(理佛: 불법의 이치와 일치하는 부처의 몸을 이룬 것)입니까? 새로 이룬 사불(事佛)입니까? 청량조사(淸凉祖師: 스님의 이름)는 성기품(性起品: 화엄종 교의의 하나로서 우주의 만유는 항상 변하지 않는 본성에서 일어난다는 설)에 의해, 부처의 지혜가 중생(衆生)의 마음에 있다는 이치를 세 가지로 말하였습니다. 즉 첫째는 중생들에게 스스로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미래의 불과가 스스로 있다는 것이며, 셋째는 다른 불과가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스님의 주장은 이 세 가지 뜻의 어느 뜻에 해당하는 것입니까? 만일 다만 성(性)이 깨끗한 본래의 깨달음을 반조(返照)하여 부동(不動)의 불과(佛果)로 삼는다면, 그것은 첫째에 해당하는 것이요, 만일 각각의 일들에 걸림이 없는 사사무득(事事無碍)을 이룬 부처라면, 그것은 둘째와 셋째의 원융성불(圓融成佛)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논하는 바, 성불하는 원융과 항포(行布: 수행하는 계급에서 마지막의 이상경인 불지에 이른다고 보는 관찰 방법) 이치는 저승에서 죽은 사람을 재판한다는 대왕인 주초의 성불이니, 그렇다면 마음을 닦는 사람들이 견성하여 성불하는 것도 십주(十住: 보살이 수행하는 오십이위(五十二位) 단계 가운데 제11위에서 제20위까지의 단계)의 첫 단계에 오른 것입니까? 불교에서 논한 바, 시왕의 자리를 빌리는 사람은 반드시 만 겁(劫)이 지나도록 부지런히 불도를 닦아야 십신(十信)을 원만히 이룰 수 있다 하였거늘, 요즘 사람들이 이미 십천(十千) 겁이 차서 주초에 올라 성불한다면, 그것은 너무 동떨어진 일로 인정(人情)에 가깝지 않습니다. 이런 의심을 풀어 주어 듣지 못했던 일을 듣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653 ▼a 고전 ▼a 한국 ▼a 사상 ▼a 선종 ▼a 교종 ▼a 합일 ▼a 지눌
7761 ▼a 지눌 ▼t 원돈성불론
85640 ▼u http://ebook.kaya.ac.kr:8080/main/detail.asp?book_num=4E3C349C-DC2F-48a1-AE7D-DCDD07BA46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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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0 ▼a 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