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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쉽지 않다… 정말 그렇다. 사는 게 힘들어지면 몸이 벌써 반응한다. 소화불량, 두통,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짜증. 그리고 바닥이 짚이지 않는 까마득한 불안. 일을 그만두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죽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깜짝) 몰랐던 사실인데 죽음은 내 주변에서 언제나 유령처럼 떠돌고 있었다. 언제든 덥석 나를 저 깊은 곳으로 끌어당길 준비가 돼 있는 죽음의 무덤덤한 얼굴. 나는 이제야 소설책 속에서 봐왔던 ‘고독’이란 단어의 참뜻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고독을 이기지 못해 먼저 목숨을 끊은 수많은 사람들의 속 깊은 밀도까지도. 그러니까 산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것이다. 고뤠? 그럼 죽어버리면 되잖아. 그러나 역시 죽을 수가 없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어쩐지 그래선 안 될 것 같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동생이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 집에 이상하게 생긴 녀석이 살고 있단 얘기를 들었다. 이 친구가 어느 날은 동생이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지붕 위에서 뛰어내리더란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의 직업이 지붕 고치는 사람이니까. “이봐 토마스. 너는 왜 지붕 고치는 일 따윌 하는 거야? 네 머리로는 더 좋은 일도 할 수 있잖아.” 그러자 이 친구가 말했다. “제가 지붕 고치는 직업을 가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 말씀드릴게요. 첫 번째, 생각을 비울 수가 있어요. 그리고 두 번째, 내가 이 일을 하면 다른 사람들이 튼튼한 지붕을 가질 수가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 일을 하면 언제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있을 수 있어요. 멋지지 않나요?”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동생에게 진지하게 그 친구와 사귀어 볼 것을 권유했다. 물론 동생은 가당치도 않은 소리라며 진저리를 쳤다. 그래서 나는 외국인 제부를 얻지 못한 대신 아쉬운대로 언젠가 이 친구를 주인공으로 소설을 한 편 써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그 소설이 완성되기 전까진, 죽을 수 없는 이유가 하나 생긴 것이다. 가끔은 이런 작은 즐거움 하나만으로 꾸역꾸역 살아남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다. 아참. 그리고 나를 살아가게 하는 또 하나의 힘. 냄비받침. “내적자신감 회복을 지향하는 지속가능한 냄비받침을 위하여” 하는 일도, 개개인의 성격도 모두 다른 냄비받침 일당들이 냄비받침 1호를 만들었을 때, 이들의 모토는 ‘내적자신감 회복’이었다. 각자가 활동하는 분야와는 상관없이 어떤 이들은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바닥을 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들은 그저 흘러만 가는 일상에 대한 허무에 지쳐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이들의 공통점은 삶에 대한 허무와 피로였다. 삶이 허무하고 피로하다는 것은 달리 보면 진정으로 원하는 것 또는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라면 나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한 번쯤은 이런 생각들을 떠올릴 것이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내가 현재와 같은 삶을 진짜 원했나?’ ‘내가 지금까지 이룬 게 뭐가 있나?’ 이런 의문에 대해 이들은 이렇게 답한다. ‘일상 바꾸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엇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뭘 원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딱히 일상의 허무와 피로에서 벗어날 방편은 찾지 못했다. 냄비받침 속에도 그에 대한 답은 없다. 또한 이들이 냄비받침을 백만 호까지 만든다고 해도 냄비받침으로 삶에서의 갈증이 완전히 해소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 냄비받침 일당들은 말한다. 상관없다고. 또 당연하다고. 냄비받침은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다만 여기에서 잠깐이나마 즐거움과, 설렘과, 안식을 얻을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그들이 사막 같은 삶에서 완전히 충만한 삶의 길을 발견할 때까지. 내적자신감 회복을 위한 독립출판 프로젝트 〈냄비받침 3호〉의 주제는 ‘빚’이라고 한다. 시, 소설, 수필, 사진 등으로 여행을 떠나는 냄비받침 3호에 이들이 무슨 수로 세상의 빚을 갚는지 보자. 혹시 아는가? 냄비받침을 읽는 독자 또한 빚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이 들지. 빚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너무 타박할 필요는 없다. 이름이 냄비받침이니, 용도대로 잘 쓰면 될 일이다. 여기에 대해선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냄비받침 일당들도 흐뭇해 할 것이다. 하여튼 쓸모가 있고, 쓸모가 있는 한 냄비받침은 계속될 것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