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 몽양 여운형은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김규식)를 파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2·8독립선언과 3·1운동이 일어났고, 이어 상해 임시정부가 서게 되었던 것이므로 그 불씨를 지핀 몽양을 빼놓고서는 한국 독립운동사 자체를 거론할 수가 없다. 두 차례의 옥고를 겪은 뒤 일제 패망을 예견한 그는 1944년 〈건국동맹〉을 결성했고, 1945년 8월 15일에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해방직후의 혼란상을 막았다. 그리고 분단된 나라와 민족을 통합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경주하다 1947년 7월 19일 흉탄에 쓰러졌다. 냉전시대의 틀에 꿰맞추어 한때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하던 시기도 있지만, 그런 경직된 틀에 집어넣기에 그는 너무도 그릇이 크고 일찍 세계화된 인물이었다. 사고의 유연성과 폭넓은 관심사는 정치, 언론, 교육, 체육, 문화 전반에 걸친 그의 글에도 반영되어 있다. 그는 "어떻게 살아가는가?"하는 방법론에 집착하면 서로 증오하고 분열할 수밖에 없으니, 우리가 누구이며 누구로서 살아야 하는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로 돌아와 통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제 그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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